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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근신, 순종

김익두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끈 인물로, 한국의 무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1874년 1월 3일 황해도 농부인 아버지의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17세에 과거 시험을 보았지만, 낙방하였고 같은 해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 뒤 술과 도박을 좋아하는 건달이 되어, 황해도 안악군 일대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1900년 27세 되던 해 김익두는 소안련(蘇安速)- William Swallen- 선교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몰래 참석하였다가, 영생에 대한 설교를 듣고 마음에 크게 찔림이 있어서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까지 10개월 동안 그는 언행을 삼가면서 성경을 백독(白讀)할 정도로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김익두는 1..
김익두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끈 인물로, 한국의 무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1874년 1월 3일 황해도 농부인 아버지의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17세에 과거 시험을 보았지만, 낙방하였고 같은 해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 뒤 술과 도박을 좋아하는 건달이 되어, 황해도 안악군 일대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1900년 27세 되던 해 김익두는 소안련(蘇安速)- William Swallen- 선교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몰래 참석하였다가, 영생에 대한 설교를 듣고 마음에 크게 찔림이 있어서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까지 10개월 동안 그는 언행을 삼가면서 성경을 백독(白讀)할 정도로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김익두는 1901년 1월 마지막 주일에 소안련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1906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 1910년에 제3회로 졸업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황해도 신천교회에 시무하면서부터 김익두는 불같은 성령의 임재, 기적의 신유를 가져오는 부흥회 강사로 부각되었습니다.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 사경회 때였습니다.

3 • 1운동 이후 민족의 좌절과 슬픔 속에서, 공산주의자와 무신론자의 도전, 정신적인 황폐, 교회의 침체,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를 어지럽히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김익두 목사를 세우시고 민족 구원의 대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디를 봐도 소망 없는 이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이적적인 방법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와 설교운동은 이적이 동반되는 집회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특한 사명을 감당하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한다고 하면 수십 리 밖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교회 안은 비좁아 밖에 평상을 내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든지 김익두 목사의 힘 있는 설교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설교는 대단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주기철 목사가 은혜를 받았으며, 특히 전재선 목사와 이성봉 목사 같은 한국 교회의 위대한 부홍사들이 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주님의 사역을 시작한 지 반세 기 동안,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시베리아, 일본까지 그의 발길을 옮겨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고,150개 처에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2만 8,000여 회의 설교를 감당한, 그야말로 이 땅의 구령사업의 최선봉에 서 있었습니다.
청년 김익두는 ‘안악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지독한 깡패였습니다. 평양 시내 신천시장에서 악명을 떨쳤습니다. 사람들이 성황당에서 그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 정도였습니다. 그런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1900년 미국인 선교사 W. L. 스왈렌의 설교에 감동하여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년 후 스왈렌에게 세례를 받고 재령교회의 전도사가 된 김익두는, 황해도 신천 지역의 개척 전도사로 파견되어 개척교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가 회개한 다음 맨 처음 한 일이 부고장을 돌린 것입니다.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시장 한 복판에 그가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술렁였습니다. 이때 그에게 모질게 당했던 한 아주머니가
“어디 옛날 김익두가 정말 죽었나 보자”
하고 물 한 바가지를 끼얹었습니다. 김익두는 물을 툭툭 털고는
“내가 죽었으니 아주머니가 살아있지 않소, 옛날의 내가 살았다면 아주머니는 오늘 죽었을 거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1910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천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1919년 강동 염파교회에서 사경회 도중 신적인 치유 능력을 얻어, 이것이 소문나기 시작하면서 그가 주최하는 부흥집회에는 치료를 받고자 많은 인파들이 찾아왔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로 고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남아 김일성 정권에 협력을 가장하면서 반공연대를 조직하는 등 우익 인사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가 1950년 10월 14일,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총에 맞아 77세의 나이로 순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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